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드웨이 해전 (문단 편집) === [[둘리틀 특공대]] ===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군과 국민들의 사기 고양을 위해서는 상대방에게도 진주만 공습 혹은 그에 준하는 상징적인 계기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이에 군 상층부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쿄]] 폭격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군 수뇌부는 틈만 나면 불려가 빨리 방법[* 현대에서는 공중급유기가 있으니 위험하더라도 가능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공중급유도 없었으며 폭격이 가능한 대형기는 대부분 육상 활주로 이착륙이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는데 문제는 도쿄 공습을 하려면 왕복이 가능한 섬을 단기간에 점령해야 가능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후에 전략 폭격기의 시초라고 불렸던 [[B-29]]의 항속거리가 6,000km였는데 이는 현재 [[보잉 737]] 같은 단거리 여객기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국제선으로 운용되는 장거리 전용 여객기들의 항속거리가 12,000km 이상을 넘고 있는 실정에서 본다면 분명 불리함이 있다(가장 잘팔리고 있는 기종 중 하나인 [[보잉 787 드림라이너#s-6.2|보잉 787-9]]의 항속거리가 14,140km다) . 일본 역시 이걸 알고 있어서, 둘리틀 특공대 이후에도 여전히 미국이 일본 본토를 타격 못할거라고 생각해 방공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B-29를 가진 미국이 사이판을 점령하자 그때부터는 일본도 본토 폭격이 된다는 걸 인식했다.]을 강구하지 않는다면서 루스벨트에게 한 소리를 듣고있었는데 항공모함에서 육상 [[폭격기]]를 발진시키면 도쿄 공습이 가능하다는 구상이 등장했고 해당 안건은 승인된 후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제임스 둘리틀 중령을 중심으로 한 [[둘리틀 특공대]]가 결성되어 성공하는 데에 이르렀다. 물론 [[B-25|중형 쌍발 폭격기]] 16대로 수행했던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이 진주만 공습과 비교한다면 대단한 물리적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에게는 진주만 공습의 울분을 해소하고 적국의 수도에 폭탄을 떨어트린 첫 신호탄이 되었으며, 일본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얻어 맞고 혼란에 빠졌다.[* 일본은 자신들을 '불침항모', 즉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라 부르며 자랑했었는데 둘리틀 특공대 이전까지는 그 어떤 외국 군대가 일본 본토를 공격한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머니까.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있긴 했지만 규슈의 한정된 지역에서 일어난 국지전에 가까왔는데다 근본적으로 도쿄 자체는 안전했다. 그렇기 때문에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 성공은 그동안 일본이 철석같이 믿던 '일본 본토는 안전하다'란 신화를 깨버린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도쿄 대공습|이일]]을 계기로 일본의 ‘불침항모’신화는 여지없이 허구로 드러나버렸다.] 이는 폭격 그 자체보다는 벌건 대낮에 미군의 폭격기에게 일본 본토, 그것도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가 대놓고 공격당했다는 상징적인 사실 때문이다. 특히 이것이 진주만 공습 때와 마찬가지로 항공모함을 동원한 공습이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진주만 공습 작전을 입안하고 성공시켰을때 "앞으로 2년 동안 미 해군은 태평양 밖으로 못나온다"라고 호언장담했던 일본 해군은 불과 4개월 만에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을 맞으면서 일본 육군과 대본영에 이 지경이 되도록 뭐하고 있었냐는 온갖 비난에 시달리며 해군에 대한 기대가 밑바닥까지 추락한다.[* 특히 천황을 사실상 살아있는 신이라 말하며 적군이 오면 천황이 바람으로 날려버린다 등 광적인 충성을 보이는 민중들에게 있어 이러한 기습적 공습은 민중들은 물론 체면이 중요한 일본군 장성이라면 머리 박고 있어야 되는 수준의 수치다. 거기다 야사에서는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공습이 끝나자 [[FDR|루즈벨트 대통령]]이 "이때 일본의 국왕이 무사했던 건 우리가 봐줘서 그런거다."라고 선전했을 정도였다니 일본의 대국민적 사기가 바닥을 쳤을 것이다.] 해군이 비난당한 것은 해상 경계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는데, 사실 해군은 둘리틀 특공대를 발견했었다. 국적불명의 쌍발기 발견이라는 보고가 올라왔지만, [[PBY 카탈리나]] 수상기가 아니며 미 해군은 쌍발기를 운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했던 것이다. 즉, 소극적으로 대응한 점은 비판받을만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본이 가진 미 해군에 대한 정보에 일치하지 않았기에 무시했던 것이다. 그 당시 가진 정보를 바탕으로 보자면 나름 합당한 판단을 내린 것이었고 항공모함에서 육상폭격기를 띄운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엔 보편적인 발상이 아니었으며 당시 이 작전에서도 최고의 위험성이 폭탄을 가득 탑재한 폭격기가 짧은 활주로에서 이륙이 가능한가? 에 대한 의구심이 미군 상층부에서도 있었기에 도박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항공모함을 위시로 한 항공기 해상전 개념 자체가 이 태평양 전쟁에서 정립되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지상포격은 전함에서 담당하고 폭격기라면 근처 비행장에서 날아오는 것이 정석이었다.[* 사실 둘리틀 특공대 이후에도 이 기본 개념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공습은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까웠으며 전쟁 당시 기술로 막대한 폭장량을 지닌 폭격기를 항공모함에서 직접 띄우는 것은 여전히 위험했다. 실제로 미국이 제해권을 거의 장악한 이후에도 일본 본토 공습이 많이 시도되진 않았다. 본격적으로 초토화 공습이 시작된 것은 45년 3월 [[도쿄 대공습]]까지 성공해 일본 본토공격의 해법을 찾은뒤 [[오키나와 전투|오키나와까지 점령]]하여 육상 활주로를 확보하고 난 이후다. 이때부턴 B-29뿐 아니라 B-17,B-24까지 동원할 수 있어서 말그대로 매일같이 폭탄을 퍼부을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일본 입장에서는 도쿄 해안선에 전함이 출몰한 것도, 근처 섬이 점령당한 것도 아닌데 본토에 폭격이 날아오니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일본 입장에서는 '천황이 거주하는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가 대놓고 폭격당했다'는 점이 컸는데, 본토에 폭격이 일어났다는 건 '인계의 신'인 [[천황]]의 옥체가 폭탄에 상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육해군 대립]]이 심화된 일본 군부에서 이는 육군이 해군을 물어뜯을 최상의 건수였다. 즉 해군은 이 사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시 천황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작자가 되는 것이다.[* 당장 자신들을 '무적황군'이라 부르며 허세를 떨고 있었는데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 타이틀 마저도 무색해진데다 이런 지경으로 몰아넣은 1차적인 원흉이 일본 해군이었으니 육군 측에서 물어뜯지 않는 게 오히려 비정상적일 정도였다.] 만약 미국이 똑같은 방법으로 일본 본토를 다시 공격한다면, 해군은 육군을 주축으로 한 반대파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을 판국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해군 수뇌부는 태평양 함대를 공략해야 한다는 야마모토 제독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야마모토 제독은 '미 항공모함은 큰 골칫거리다'는 판단하에 미드웨이 공격을 제안한 것이었으나, 이전까지는 아무도 항공모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무시되었던 것이다. 허나 '항공모함'에 '육상 폭격기'를 싣자 일본 본토까지 폭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항공모함에 대한 평가는 180도 달라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야마모토 제독은 혜안을 가지고 미드웨이 공격 안건을 제시한 셈이 되었고 수뇌부는 그 선견지명을 무시한 까닭에 이 험한 꼴을 당했다는 여론이 세워졌다. 이미 이전에도 일본 해군에서는 거의 선지자급으로 존경받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말이 사실이 된 이상, 체면 문제가 걸려 있던 해군에서는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대본영에서도 큰 저항없이 이 작전을 채택했다. 더불어 육군에서도 정예 연대를 편성하여 상륙 부대로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거기에 더해서 해군이 요구한다면 항공모함의 기지인 하와이 그 자체를 점령하는 작전에도 동의하였고 이에 따라 2사단과 7사단, 53사단이 하와이 침공을 위한 훈련에 들어갈 정도로 일본군은 이 공습에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육군이 이렇게 해군의 작전에 협조적으로 나온 이유는 육군도 도쿄 공습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쿄 공습의 책임은 당연히 해상경계에 실패하고 미 항모기동전단의 접근을 허용한 해군에게 있지만, 도쿄 상공에서의 방공전을 실패한 책임은 육군에게도 일정 부분 있었던 것이다. 한편 미군은 일본군의 다음 공세를 대비하면서 일본군을 기만하고 정보를 캐내기 위해 두 번의 기만책을 시도했는데 일본군이 매번 걸려드는 바람에 대박이 터진다. 곧 이어지는 문단에서도 설명하지만 극비라고 숨기면서 진주만 공습을 준비해왔던 이전에 비해 이번에는 대놓고 공개하다시피 할 정도로 보안이 엉망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